• 최종편집 2024-05-16(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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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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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오성한 목사] 죄짓지 않으려는 삶이 아니다
    새 본성에 신경 써라. 옛 본성으로 살지 말고, 새 본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옛 본성을 죽이는 것을 신앙생활로 착각하지 말라.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이셨다. 그리고 새 본성을 우리에게 주셨다. 옛 본성을 죽이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배웠다면 잘못 배운 것이다.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도 저주를 받는다. 옛 본성에 신경을 꺼야 한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 우리를 결코 정죄할 수 없다. 우리를 주님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영원한 새것으로 만들어 주셨다. 옛것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예전에 없던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셨다. 그러기에 새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 옛 본성을 묵상하고 고민해서는 안 된다. 새 생명을 주시고 임마누엘의 우리를 묵상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믿는 자의 삶은 신바람 나는 삶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했다. 이미 해방했다. 성경대로 일단 받아드려라. 성경대로 믿겠다는 결단이 믿음의 결단이다. 이제 우리는 죄에서 자유다. 죽음에서 자유다.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죄에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살면 안 된다. 죄에서 자유롭기 위해 사는 자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 자유 한 자다. 이전에 나는 실수할 때마다 죄책감으로 눌렸다. 항상 실수가 많으니 늘 죄의식으로 살았다. 그러나 복음을 깨닫고 난 후 자는 자유하다. 여전히 실수하지만 그때마다 감사하다. 나의 실수와 아무 상관없이 나와 함께 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았다. 이제 나는 실수한다고 해서 나의 실수를 묵상하지 않는다. 새로운 생명을 묵상한다. 아무리 실수를 해도 이미 나를 용납하신 주님이 너무 좋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실수하는 일이 적어지고 이길 수 있게 되었다. 방수 시계에 물이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죄가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죄를 빼낼 것이 없다. 회개하면 된다. 회개란 삽자가의 보혈로 용서받았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용서를 믿는 것이 믿음이다. 실수에 집중하지 말고 용서의 감격에 집중하라. 죄를 범하는 실수를 할 때 빨리 회개하라. “주님, 제가 이렇게 부족하고 실수투성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땅에 왔다 가셨음을 믿습니다. 저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또 한 번 경험합니다. 주님만 의지합니다. 제사 실수한 것을 묵상하며 자괴감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철면피 같아 보이지만 주님의 하신 일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제 안에 영원히 함께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며, 성령과 교재하며, 주님 이루어 주신 것을 묵상하며 새 힘을 얻어 살겠습니다.”라고 믿음으로 새 생명에 집중하라.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안 짓기 위해 사는 자가 아니다. 이미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믿으며, 감사와 감격으로 사는 자다. 우리는 죄를 안 지으려고 사는 자가 아니고 새 생명 속에 믿음으로 사는 자다. 그래서 늘 기뻐하는 자다. 범사에 감사하는 자다. 항상 기도하는 자다. 연약한 삶 때문에 묶이지 말고, 성경대로 받아들이고 믿어라. 우리는 죄에서 자유다. 죄에서 자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아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자유한자다. 죽음에서 자유하기 위해 애쓰는 자가 아니다. 죄와 싸워 승리하는 방법은 이미 용서받은 우리를 인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승리한 것이다. 죄를 안 지으려고 싸우는 것은 바른 방법이 아니다. 이미 죽은 것을 죽이려는 것과 같다. 옛 본성에 신경 쓰지 말라. 새 본성에 신경 써라. “죄와 싸우라”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여라”는 말이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을 아무리 넣으려 해도 넣을 수 없다. 우리는 어두움이 아니다. 우리는 빛이다. 우리는 거듭난 새 생명을 인식해야 한다. 옛 본성과 싸우려 하지 말고, 새 생명에 초점을 맞추라. 자유가 이미 선포되었다.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을 알고 영광을 돌리자. 다시 정리한다. 옛 본성과 싸우려 하지 말고 새 생명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라. 자유가 선고되었다. 이미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셨다. 부활로 새 생명을 주셨다. 이미 새 생명을 완벽하게 얻었다. 다시 얻을 필요가 없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누리기만 하면 된다. 이런 쉬운 복이 어디 있는가! 값없이 돈 없이 와서 사라고 했다(사55:1).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완벽하게 세팅하셨다. 그러기에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공짜로 이루어 놓으신 은혜를 수용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내가 설득되는 것이다.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 큰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공짜로 주신 생명을 인정만 하면 된다. 새 생명이 있음을 알지 못하면 영적 무지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무지하면 누릴 수 없다. 알아야 누린다. 하나님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했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다. 자유 하라. 그냥 받아들이는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 주님은 이미 세팅해 두셨다. 마시기만 하면 된다. 이미 이루어 놓으셨다. 죄를 안 짓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주신 일에 초 신경, 초 집중을 하라. 계속, 계속, 계속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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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최호숙 목사] 삶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생의 삶을 사는데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태도(attitude)가 고도(altitude)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가 아래로 향하느냐 위로 향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고도가 결정되듯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방향과 높이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높이 오르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높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본다고 한다.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값이 싸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다. 항상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려움이 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는 자들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갈렙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믿음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잔류하고 있는 아낙 사람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분명 함께 하실 것이니, 내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수 14장 12절)” 갈렙의 신앙은 능동적 신앙의 삶이었다. 45년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후퇴 반응을 보였지만 갈렙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벌써 85세 고령인데도 여전히 적극적인 Next Vision 성취를 지향하며 살았던 것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창업하기 전 레이 크록은, 53세 나이에 겨우 밀크쉐이크와 함께 30년 동안 종이컵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반평생을 보냈다. 그래도 그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30년이라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성공을 한 것이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는 먹이 사냥에서 사냥감을 잡는데 약 스무 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성공한다고 한다. 그는 실패 앞에 포기가 아니라 도전의 태도를 가져 그 도전이 성공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번 실패하면 쉽게 단념하고 한탄한다. 잃은 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이 자산이 되어 다시 도약해야 한다.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음악가였다. 31세로 죽을 때까지 방 한 칸 없었고, 그토록 필요한 피아노 한 대 없는 불우한 음악가였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악상이 떠올랐다. 그는 오선지를 찾았다. 친구가 레스토랑 메뉴판에 오선지를 그려주었다. 그것이 유명한 아베마리아 세레나데이다. 환경에 낙심할 필요 없다. 주위 시선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폭풍이 일어도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가면 길이 열린다. 신앙의 열정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고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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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조희완 목사] 자유의 축복 (요8:31-36)
    1997년 북한의 권력서열 제3위(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던 <황장엽>씨가 주중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 망명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로 망명함에 따라서 그의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 권력층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남한으로 망명을 할 경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한으로 망명을 감행한 이유는 바로 체제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고, 너무나 잘못되어 있는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무모한 망명을 한데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역사가 평가를 할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소중함”입니다. 체제의 자유, 정치적인 자유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이 있는 나라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던지고,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억압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애타게 목말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정치적인 자유보다 더 필요하고 소중한 자유가 있는데 바로 영적인 자유(신앙의 자유)입니다. 그 영적인 자유에 대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를 취하는 방법을 알아야합니다.(요8:32,36) 둘째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야합니다.(갈2:4) 셋째는,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갈5: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소중한 자유를 잘 지키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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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김성수 총장] 대조적 백성의 매력적인 삶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신분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됨의 정체성이다. 베드로 사도가 선포하는 바와 같이 우리 모두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 긍휼을 입은 자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과 출애굽의 언약을 배경으로 삼아 생각해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 됨의 정체성이 갖고 있는 풍요한 의미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창세기 12:2-3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위대한 민족이 되어서 온 세계에 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그리고 출애굽기 19:5-6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게 될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스라엘이 신명기의 율법을 지킬 때, 그들은 열방 가운데서 대조적 백성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함은 다른 모든 나라가 갖고 있는 질서와 완전한 대조를 이루는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율법은 땅의 축적이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서 부를 추구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율법은 가나안 민족 안에서 행해지던 일들을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혁명적인 일이었다. 가나안의 지배자들은 작은 왕국에 있는 모든 땅을 소유했고, 무거운 세금을 받는 대가로 다른 사람들이 땅을 경작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삭 줍기’ 법은 추수의 일부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남기게 하는 것이었다(레19:9). 십일조는 레위인과 가난한 자들을 부양한다(신26:12). 일꾼에게 공정한 임금을 지급하는 것(신24:14)과 심지어 동물을 위한 법(신25:4)도 있다. 이렇게 율법은 정의를 요구하고 약자와 취약계층을 향한 호의적인 돌봄으로 확장된다. 억눌린 자, 주린 자, 갇힌 자, 눈먼 자, 낙심한 자, 나그네, 고아와 과부를 돌봐야 하는 이스라엘의 책임은 연약한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에 기초해 있다(시146편).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정의와 자비의 사회생활은 주변 나라들의 감탄과 부러움을 자아내도록 계획되었다. 주변 나라들은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콘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4:8)라고 외칠 것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동일한 문화에 속해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로마 제국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매력적인 표지(sign)이었다. 이들은 실제로 매력적이었다. 2세기 혹은 3세기에 살았던 어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삶이 이방인들을 교회 공동체로 이끌었다. … 우리는 위대한 것들에 대해 말하기보다 삶으로 보여준다.” 매력적인 삶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사회적 불가능성”의 삶이었다. “사회적 불가능성의 삶”이란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들이 복음으로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가능하게 된 삶을 의미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바로 이와 같은 삶을 살았다. 그들이 삶으로 선포했던 강력한 사랑과 자선의 복음은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병든 자, 광부, 죄수, 노예, 나그네를 행해 선포되었다.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이와 같은 본보기적인 도적적 삶은 로마에 만연한 부도덕한 모습과 대조를 이루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소망, 기쁨, 확신은 무너져 가는 제국의 절망, 불안, 불확실성 속에서 밝게 빛났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연합된 모습은 로마의 분열과 다원주의와는 분명한 대조를 이루었으며, 이들의 삶은 당시 퇴폐적이고 성적 음란으로 가득 한 로마제국 안에서 순결, 결혼생활의 신실함과 자기절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들 그리스도인의 검소한 생활방식과 더불어 소유와 재산을 관대하게 나누는 모습은 재산의 축적과 소비를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별지었다. 서로를 용서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증거했다. 우리도 오직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초대 교회 성도들과 같이 세상과는 대조가 되는 매력적인 삶을 영위해 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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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황권철 목사] 마산세광교회(06) : 도움을 받아 제자가 됩니다
    마산세광교회(김일용 목사)는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 북2길 128에 있다. 이 교회는 1981년 지금의 원로목사인 유창수 목사(당시 전도사)가 옛 주소인 구암동 1332-7에 교회당 부지를 매입하여 그해 9월 13일에 창립예배를 드림으로 태동 되었다. 유 목사는 38년이 지나 2018년 12월 2일에 은퇴하고 원로목사 추대를 받았다. 현 담임목사인 김일용 목사는 2019년 5월 12일에 부임하여 9월 15일 경남(법통)노회에서 마산세광교회로 교회명칭 변경 허락을 받아 사역하고 있다. 이는 창원세광교회(황은선 목사)가 장로 3인을 포함한 15명의 성도들을 파송해 줌으로 교회가 새로운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이 같은 일에는 노회 산하 지역교회를 살리고자 하는 황은선 목사의 헌신적인 섬김과 김일용 담임목사의 열정적인 사역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과였다. 오늘은 교회순방 여섯 번째로 맞이하는 날이지만 주일이면 늘 설렘과 기대감이 교차된다. 주일 제2부 11시 예배시간에 맞추어 10분전에 도착하여 교회당에서 조금 떨어진 안전한 곳에 주차하고 예배실로 갔다. 마침 오늘 오후예배(2:30)에 김일용 목사 위임예식이 있어 예배실과 주차장, 식당, 그리고 카페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오후에 오실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배실에 들어서는 순간 교회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동감이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다. 예배실에 걸려 있는 사역 프로그램이나, 주보 속지에 들어 있는 주일 1-2부예배 설교 요약본과 구체적인 것은 교회의 비전선언문에 더욱 잘 나타나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고, 자녀를 예수님의 제자로 세우고, 가정을 하나님 나라의 대사관으로 세우고, 교회를 하늘 가족의 공동체로 세우고,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세우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김 목사는 가정을 중시하는 목회자였다. 가정과 교회가 함께 세대간의 부흥을 이루기를 소원하고 있었다. 가정은 교회요, 교회는 가정이다. 가정과 교회는 신앙을 전수하는 학교라고 했다. 가정이 모여서 교회가 되고 모였던 교회가 또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면 그 가정이 교회가 된다고 했다. 교회는 주일 중심이지만 가정은 매일같이 교회중심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가정을 세웠고, 그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했다. 금주설교 제목은 “도움을 받아 제자가 됩니다”(행 18:24-28)이다. 구원의 역사는 복음전파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가 됨에는 서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성경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에베소에서 목회할 때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할 뿐 요한의 세례만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 평신도 중에 고린도에서 바울에게 가르침을 받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살아 있는 복음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이 평신도의 지적과 충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도량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은 항상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 아볼로 같은 성경학자에게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평신도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순간순간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의 연약함을 돕게 하신다고 했다. 우리의 마음이 강퍅하여 마음 문을 열지 않고 있으면 성령님이 탄식한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히 마음 문을 열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 성령은 보혜사가 되어 우리의 전후좌우를 지켜 주신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연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문다. 그래서 바울은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다.”(고후 12:9)고 했다. 우리가 겸손히 주님 앞에 무릎 꿇어 나가면 그는 강한 팔로 우리를 안아 주신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 우리가 때로는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 하나님이 탄식함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 주신다(롬 8:26-27). 그러므로 우리가 주께 나아와 엎드리면 그가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에게는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김 목사는 창원세광교회 부목사로 섬기다가 이 교회에 부임하여 오늘 오후예배 때 위임을 받는다. 그는 창원세광교회 서리집사로 입시학원을 경영하면서 친히 수학 강사(사모는 국어 강사)로 제법 잘 나가는 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정건 목사(전 고려신학대학원장)의 설교에 소명을 받고 사십대 중반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여 신대원 68회로 졸업하여 창원세광교회에서 강도사와 부목사로 섬기다가 이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필자가 김 목사의 설교를 처음 들은 때는 창원시찰 여전도회 순회예배 때 강사로 초청하여 들었던 설교가 너무도 인상 깊게 남아 있어 그의 목회열정이 남달랐음을 알게 되었다. 김 목사의 뜨거운 열정을 교회당에 들어서는 순간 여기저기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최근에 조성한 입구 주차장은 누구든지 교회를 출입하기에 불편하지 않도록 잘 준비해 두었다. 2층 예배실로 들어서면 뜨거운 찬양과 예배시간에 강단에서 불을 품어내는 스폴존 같은 열정적인 설교는 성도들의 갈한 심령의 생수였다. 예배를 마치고 1층 식당에서 목사님과 당회 장로님들과 함께 애찬을 나눈 후 옆 건물에 잘 꾸며 놓은 카페로 가서 사귐과 교제를 통해 가정 같은 교회임을 실감했다. 오늘은 김 목사가 직접 내려놓은 커피 한 잔을 놓고 그의 부름 받은 목회의 소명을 잠깐 나누고 ... 현역 목회자에게 주일은 황금 같은 시간이기에 더 이상 아까운 시간을 빼앗을 수가 없어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순방길에 배려해 주신 김 목사와 당회원들의 따뜻한 손길에 감사드리고, 이제 다시 매일 새벽 중보의 쟁반에 또 하나의 기도제목을 올려놓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한다. 2024년 2월 25일 11시 예배 순방 고려파교회연구소장 교육학박사 황권철 목사(밀알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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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탐방
    2024-04-12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04-12
  • [독자기고]이현령비현령(4) - 가스라이팅 (gaslighting)
    고신!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이름입니다. 고신!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고 했습니까! 고신!순교자의 정신,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노래하지만 지나가던 개가 고신을 비웃어도 고신에 속한 사람들 중 몇 명이나 당당하게 반론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개가 고신을 비웃어도 관심을 가질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고신!그래도 고신이 고신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고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신!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이여! 고신! 고난도 슬픔도 그 이름 아래 묻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이름이여! 고신에는 각계각층에 많은 인재들이 있습니다. 의외로 인재들이 많습니다. 우리 선배들의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철저한 신앙교육으로 훈련받은 인물들이 아직도 곳곳에 건재합니다. 오늘 우리는 선배들의 신앙과는 너무 멀어져 있어 다음 세대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인재들이 양산될지는 극히 우려스럽습니다. 위기의 고신이라지만 마지막 희망 하나가 있다면 그렇게 훈련받아 각계각층에서 묵묵하게 고신의 신앙을 지켜가는 인재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왕상19: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문제는 그 인재들이 교단 내에서는 대부분 소위 정치를 등지고 살고 있습니다. 허물어져 가는 위기의 고신을 위하여 두 팔을 걷어붙이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희생과 수고를 하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여리고성과 같은 절벽을 만나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제 내 교회나 잘 섬기다가 가리라!”라는 푸념을 내놓게 됩니다. 교단 외부에 있는 인재들은 고신을 사랑하는 신앙과 정신이 소외되었다는 안타까움과 서러움과 절박함으로 오히려 원한이 되고, 원성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뿌리가 고신이요, 고신 신앙이기에 고신이 문을 열고 불러만 준다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신의 품으로 달려올 자들이 분명합니다. 고신대, 복음병원의 위기를 위기라고 말들 하지만 어쩌면 이 위기가 진짜 위기인지 모릅니다. 오랜 세월 이러한 위기가 있어 왔기에 오늘과 같은 고신대, 복음병원의 위기는 불을 보듯 자명한 사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고신 내부에 있는 인재들과 고신 외부에 있는 인재들이 왜 이렇게 산화하여 떠돌고 있을까요? 세월이 가면 나이를 먹듯이 자연스러운 질서나 예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면 바른 기준과 질서에 따라 책임과 권한이 주어져야 합니다. 총회 산하 기관에 몸을 담고, 고신의 식구로서 고신의 교회와 기관을 위해 한 몸 불사르겠노라고 하는 청운의 꿈을 다짐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줄을 서야 되는지를 눈치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신의 기관에 몸을 담은 식구들은 이 눈치, 저 눈치, 이 계파, 저 계파, 이 진영, 저 진영, 이 집안, 저 집안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낼 때 자연스럽게 진급을 하고 책임 있는 사명과 자리로 옮겨가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일을 잘해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위기를 직시하고 위기를 부르짖으면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되고, 다 같이 헌신해서 위기를 돌파하자고 외치면 손해 보기 싫어하는 동료들도 외면할 뿐 아니라 집행부에서는 다루기 힘든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그러니 제일 잘하는 방법, 제일의 능력은 비위를 맞추고 손을 비비면 됩니다. 급기야 직원들에게 보직과 사명을 맡기면서 “어느 계파에 속해 있느냐? 누구와 가깝느냐? 어느 진영 사람이냐?”가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고 합니다. 이해하기 좋게 최근의 있었던 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평생을 고신대를 위해서 온갖 어려운 일 마다하지 않고 봉사한 이명호 장로의 일입니다. 이 장로는 고신대 기독교교육학과(82학번)를 졸업하고, 1989년 고신대에 몸을 담아 35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2022년 6월 처장으로 보직을 받아 올해 2024년 12월에 퇴직(은퇴)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퇴직을 앞에 두고서 6개월 휴가(공로)를 주는데 이렇게 볼 때, 올해 2024년 6월 30일까지 3달만 더 근무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장로는 3달도 채 남지 않은 4월 3일에 처장에서 해임되어 학술정보관장(구. 문헌정보관장)으로 밀려(인사발령)나게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당사자는 정작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라도 알려주면 좋겠다.”라고 합니다. 이 장로는 한평생 고신대에 몸을 담았고, 고신의 장로로서 “기독교 대학으로 바르게 성장해 가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정말 사람이 없어진다. 안타깝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장로는 현재 총장의 직계 후배입니다. 작년에 현 총장이 총장으로 선임된 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 도와달라 끝까지 함께 가자”고 부탁을 했고 이 장로도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다고 했는데 결과는 위와 같습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총장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 할 사람입니다. 고신의 장로 아들로 누구보다도 고신을 잘 알고 후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총장이 되고 나서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까? 겨우 몇 달 사이에 말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이 총장으로서는 얼마나 든든하고 믿을 수 있는 후배가 아닙니까? 한평생의 일을 마무리하는 이 장로 역시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2달도 남지 않은 이 장로를 보직해임 시키고 학술정보관장(구. 문헌정보관장)으로 물러나게 했습니다. 과연 총장이 그렇게 했겠습니까? 총장의 평소 인품을 잘 아는 필자는 절대로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학교 구성원들은 총장은 허수아비요, 다른 사람이 실제 총장이라 말한다고 합니다. 학원 이사는 물론이요, 법인 사무실의 직원이 학교와 병원을 좌지우지한다고 입을 모은다고 합니다. 학교와 병원의 보직 인선에 총장이나 병원장의 의중보다는 외부의 입김이 더 크다고 교직원들은 말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지만 고신과 고신대를 위기로 몰아넣은 오늘까지의 악습이요, 안하무인입니다. 이런 상황에 기관의 구성원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까? 아니 어떤 자세를 취할 것 같습니까? 학원 이사들은 위기라고 소리치며 교회의 호주머니를 노릴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산하 기관의 식구들이 정당하게 일하고 정당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예상 가능한 행정을 집행하기 바랍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영광을 위한 기관을 누가 이렇게 똥 칠을 하고 있습니까?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우리 사람으로 불렀으면 적어도 1-2년은 전권을 주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왜 사람을 불러 놓고 이런 말을 듣게 하고, 이런 식으로 손발을 자르고, 얼굴마담 노릇을 하게 합니까? 기준이 허물어지면 이렇게 됩니다. 법을 집행하는데 “법은 아니라 해도 우리가 다 찬성하면 할 수 있다”고 하는 결과가 바로 이것입니다. 총장을 정당한 방법으로, 정당한 법으로 초빙했어야 합니다. 억지로 총장을 불러오기 위하여 학원이사회와 총회를 운영하는 자들은 총회와 총대들을 속이고 기만한 결과가 이런 폐단을 만들었습니다. 불법적인 정관개정 고려학원 이사회는 지난 73회 총회에 고려학원 정관개정을 의뢰했고 총회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총회에 상정되는 안건은 정확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개인이라면 당회와 노회를 거치고, 법인이라면 법인 이사회에서 충분히 논의하고 결정한 안건을 상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총회는 바로 그 안건을 접수하여 다루어야 합니다. 지난 73회 총회는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 정관개정 안건을 접수했고,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관개정 논의를 위한 임시이사회는 정작 총회를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2023년 연말에 열렸고, ‘사후 인준’이라는 명목으로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이 총회 법을 따른 정당한 절차입니까? 총회는 결과적으로 이사회가 제대로 논의하지 않은 안건을 접수, 논의, 개정했고, 고려학원 이사회는 총회와 교단을 기만했습니다. 이런 불법적인 개정안으로 총장 공모는 이전에 하고, 총장 선출은 개정된 법으로 집행했습니다. 총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법으로 총장에 오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사욕의 의도를 가진 불의한 자들이 총장의 발목을 잡은 결과입니다. 총장의 발목을 잡은 총회의 몇몇 실권자들이 고신의 미래요, 자랑이자 자부심이기도 한 고신대와 복음병원을 세상보다 더 저질 기관으로 만들고 있음을 자인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총회와 총대를 기만하고 속인 학원 이사들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아니 총회는 이것이 사실일 경우 모든 이사들을 반드시 소환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을 결정하게 된 총회 임원회도 당연히 책임져야 합니다. “나는 몰랐다, 모른다”고 하는 총대들 역시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서든지 자신이 없으면 이번 총회 총대를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고신을 위해 하나님으로 부름을 받은 고신의 총대들이여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습니다. (살전5:6)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벧전4: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상에게 정서적인 학대를 지속하여 대상이 자신의 판단력이 매우 낮다고 스스로 믿게 만들어, 그가 행위자에게 의존하게끔 만드는 세뇌의 일종입니다. 가해자에게만 이득이 되는 교묘한 궤변, 날조, 선동, 정치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회 곳곳에서 정권(?)을 잡고 있는 실세들은 총회와 산하기관들을 “가스라이팅(gaslighting)”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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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4-12
  • 오는 4월 13일, 다음세대를 위한 마커스워쉽 초청집회
    <다음세대를 위한 마커스워쉽 초청집회> 일정 : 2024년 4월 13일(토) 오후 5시 장소 : 김해시 은석문화복지센터 인도 : 소진영 간사 말씀 : 김영한 목사(품는교회) 주최 : 어웨이커스 협력 : 경남기독교총연합회, 김해시기독교연합회, 부산시기독교연합회, 김해시청기독신우회, 은석문화복지재단, 한복운부경총 문의 및 신청 : (홈페이지) https://awaker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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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계
    2024-04-08
  • [박동철 장로] 정의(JUSTICE)가 없어지는 대한민국 사회인가?
    세계 지성인들을 넘어 일반인들에까지 베스트셀러가 된 마이클 센델의 ‘정의는 무엇인가’(JUSTICE)의 책을 읽으면 다소 어렵고 혼란스럽다. 그런데 급변하는 세계 정치 경제 사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의문들을 진지하게 풀어낸 가히 세계 베스트 셀러의 가치가 있다. 27세에 미국 명문 하버드 대학 교수가 된 마이클 교수가 강의 현장에서 수많은 학생들과의 강의와 질문 그리고 토론 심지어 강의장에서 논제를 놓고 투표를 하면서 정의를 찾으려는 몸부림이 살아있는 저서에서 읽히고 있다. 이 책에는 수많은 역사속의 사회 정치 경제 석학들을 소환한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토론하고 결론을 내려고 애쓴다. 필자가 느끼기에는 별다른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온 세계 인류 보편적 행복을 위한 정의의 뜻을 독자 나름대로 찾을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 정의(JUSTICE)는 어떻게 재단되고 사회 현장에 적용해야 하는가. 보편적 사회 기능에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을 권리를 찾는다. 그리고 재화의 분배를 통해 포상과 장려의 삶의 문화를 위해 법치가 기능을 한다. 이에 따른 사회 공공선을 이뤄감이 이상일 것이다. 그것이 사회 정의를 지켜내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회 정의가 이때만큼 혼란스러울 때가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생겨나고 있다. 갈등과 분열의 사회현상에서 더욱 뜨거워지는 사회정의의 담론이 우리 앞에서 서있다. 22대 국회의원총선을 겪으면서 정의와 불의가 혼돈되고 있다. 보편적 정의란 무엇인가의 담론에서 찾아낼 수 없는 심각한 사회병리현상이 무섭다. 사회 지도자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법과 도덕의 적응도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한다. 그것이 안 되면 국가관리의 지도자 되기를 포기하고 양보해야한다. 그래서 국회의원을 선량(選良)이라고 칭하지 않는가. 전과 기록은 이제 불필요하다. 너무나 무섭고 부끄러운 사회 범죄를 행하고도 정치 권력에 탐욕을 내는 군상들이 사회 정의를 짓뭉개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성경 창세기에서 보듯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어졌기에 공동체의 선을 함께 이뤄 가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구원의 목적을 위해 심판 현장에서도 사랑과 용서를 통해 하나님은 공동체 선을 위해 작업하신다. 선악과를 만드시고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한다. 그러나 먹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인본주의 신봉자들이 세상을 덮어 가고 있다. 기독교 사회 운동가 스콧 D 알렌은 ‘사회 정의는 성경적 정의인가?’라는 저서에서 설파했다. 사회 정의가 성경적 정의와 일치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오늘날 이미 죽었다고 하는 인본주의 막시즘이 문화 막시즘으로 다시 살아나 인류를 혼돈하게 한다고 했다. 마르크스의 사회경제학은 이미 실패로 끝났지만 새로운 인본주의 이념으로 정의의 가치를 흔들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보는 것에만 나온 진단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주변 정세에서 흘러들어오는 정의의 가치를 깨고 있는 전체주의 이념의 위험한 수용이 우리사회를 흔들고 있다. 정의사회의 위험한 시대 우리는 어떻게 할 것 인가. 오직 복음 전파의 가치관이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의 정의가 세계 복음화와 함께 인류 번영을 이끌 수 있는 새로운 무브(move)가 필요하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는 기독교 기본 핵심이 온 세계 복음으로 전파될 때 이 땅은 그래도 공동선의 문화가 세계를 리드하지 않겠는가. 정의(JUSTICE)가 살아있는 진정 행복의 땅이 되지 않겠는가. 정의가 메말라버리는 세상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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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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